화려한 모란꽃에 흠뻑 젖어들어 ... (4/23)
모란 꽃은 꽃중의 제일이라고 꽃의왕 또는 꽃의 신으로 부귀를 뜻하는 목본식물로
화려하고 위엄 과 품위가 있어 일명 부귀화라 불리우기도 하는데 그 종류가 다양하다
그런의미에서 도양화하는 분들이 그림 또는 자수하는 분들은 옷에도 자수로 .....
씨 또는 뿌리 나눔 그리고 작약에 접목등으로 번식 재배하고
뿌리는 한방에서 소염 진통 정혈 고혈압에 쓰인다
해마다 4월 고궁 과 정원에 피어난 모란을 카메라에 담아 왔는데
어쩌다보니 고궁은 쉬는 날이라 담는걸 접구 시기를 노친 감은 있으나
정원에 화려하게핀 목단꽃을 담다
모란 꽃 그것이 그것이라 생각 되기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러모습을 담은 걸 올렸다 . 모란 하면 시인 영랑 김윤식이 떠오르기에
그의 " 모란이 피기까지는" 대표시와 생애에 대한 이야기들을 올리다
김영랑의 생애
장흥에서 강진읍으로 들어오는 <영랑 로터리>에 우리 나라 서정시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히는 영랑 김윤식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북도에 소월이라면 남도에 영랑이라던 그 영롱한 서정의 극치야말로 오늘날에도 아낌없는 찬사로 회자되고 있는데,
영랑은 그의 시심이 뿌리를 내린 고향 강진 어귀에 서서, 아직도 모란이 피는 찬란한 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903년 강진읍 남성리에서 태어난 영랑은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나온 후 서을로 올라와
서울 기독청년 회관에서 영어를 배우고 휘문의숙에 입학한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 만세 운동을 모의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경에 체포되어 6 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1920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중학부에 편입하나,
1923년 동경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의 생가로 돌아온 영랑은 민족 수난의 한과 비애를 달래기 위해
대나무숲에 싸인 생가의 사랑에서 손수 북을 치면서 시를 읊었다.
마침내 영랑의 서정시가 영롱한 광채를 발하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30년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등이 동인이 되어 내놓은 <시문학>에서이다.
그리고 1935년 박용철의 힘으로 시문학사에서 <영랑시집>이 발간된다.
그의 유명한 시<모란이피기까지>도이시집에수록되어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최남선, 이광수, 노천명, 서정주 등이 일제에 꺾여나갈 때
영랑은 김정한처럼 붓을 놓고 지조를 지켰다.
광복을 맞은 영랑은 우익청년운동에 정열을 쏟았으며 1949년에는 한때 공보처 출판국장의 관리직을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을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지하 생활을 하다가
서울이 수복된 9월 28일 포탄의 파편에 부상을 입고 이튿날 운명하였다.
2. 김영랑론 -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 준 김영랑
김영랑(1903-1950)의 본명은 김윤식으로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출생하였다.
강진 보통 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휘문 의숙을 다니다가 3.1운동으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이 일로 휘문 의숙을 중퇴한 김영랑은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 다시 학업을 중단하고 강진의 자택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강진에서 무료한 생활을 하고 있던 영랑에게 송정리의 벗 박용철이 찾아와 시 전문지를 같이 내자고 제안했다.
박용철은 오랜 숙의 끝에 사재를 털어 [시문학] 창간호를 1930년에 발간하게 된다.
1930년은 김영랑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그 해 3월에 간행된 [시문학] 창간호에 13편의 시를 한꺼번에 발표하며 시단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나온 [시문학] 2호에 9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20편이 넘는 작품을 1930년 두 달 동안에 한꺼번에 발표했던 것이다.
김영랑의 시는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카프를 중심으로 쓰여진 경향시는 생경한 사상성과 경직된 목적 의식을 주로 드러냈기 때문에
당시의 시단은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 주는 김영랑의 시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이로써 시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변화하였고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방법적 자각을 가지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경향시 위주였던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시에 대한 인식 변화시켜
김영랑의 시에는 '내 마음'이라는 어휘가 유달리 많이 보이는데
그가 이 말을 많이 사용한 것은 내면의 순결성을 표현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직접 제시하지 않고
대부분 자연의 이미지를 통하여 표현하였다.
그의 초기 시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자연의 정경은
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것들이다.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에 제시된 아침 햇살처럼 빛나는 은빛의 강물,
[제야]에 제시된 맑은 샘물과 밤의 심상, [가늘한 내음]에 제시된 보랏빛 노을의 고요한 아름다움,
[내 마음 아실 이]에 나오는 향맑은 옥돌의 심상 등은 모두 마음의 순결성을 나타내는 예들이다.
이렇게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자연의 정경을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순결한 마음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김영랑 서정시의 출발은 바로 이 순결성에 있었다.
이 순결성이 그의 시를 아름다운 해조와 서정주의의 극치로 몰아간 것이다.
그 순결한 마음은 자연의 미묘한 변화와 대응되므로 분명히 파악되지는 않는다.
순결성은 꽃가지의 은은한 그늘이나 봄날의 미미한 아지랑이처럼 모호한 상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영랑은 자연의 맑고 깨끗한 정경을 통해 마음의 순결성을 보여 주었는데,
자연의 정결한 모습에 집중하게 되면 자연히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황홀감을 갖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본래 자연을 통한 순결성의 추구는 현실 세계의 추악함을 인식하는 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
이때에 자연은 현실과 대립적 위상에 놓이게 된다.
현실은 고통과 비애가 교차되는 장소로 인식되는 반면,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은 이 모든 현실적인 것을 망각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의 많은 시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연의 어느 한 순간이 가져다주는 극치의 아름다움은
그의 정신을 몽롱케 할 정도로 황홀감을 안겨 준다.
저녁놀이 물드는 보랏빛 하늘, 밤 깊이 흐르는 물소리와 찬란한 별떨기,
은색으로 황홀히 빛나는 달빛, 맑은 가을날의 고요한 정경,
이 모든 것이 자연미의 한 정점을 보인 것이어서 시인은 그 황홀감에 가슴 설레며 몸둘 바 몰라 한다.
그런데 이 황홀한 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모란이 한번 흐드러지게 피어 그 찬란한 빛을 불태웠다가 천지에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쉽게 소멸하는지 모른다.
자연의 순결성도 현실 세계의 혼탁함 때문에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지 않으며,
자연의 황홀한 아름다움 또한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라면
영랑의 자연 인식은 비극적인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그 비극성이 그의 심혼을 긴장시키고 그의 서정시를 가능케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모란이 사라져 버리고
자신의 마음에 비탄과 상실의 감정이 남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해 놓았다.
'뚝뚝'이라는 시어를 통해 모란이 무정히 사라져 버리는 정경을 소리로 나타내는가 하면, '
떨어져 누운 꽃잎마져 시들어버리고'라는 시행을 통해 처절한 상실의 순간과
상실 뒤에 오는 형언할 수 없는 비탄의 정서를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삼백예순 날을 계속 울고 지낸다는 과정적 표현을 배치하여
그리움의 정도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한편으로 영랑의 자연에 대한 인식이 시인 자신의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음악적 장단과 호응을 이루며
하나의 정경으로 표현될 때 그것은 오롯한 미의 원광을 두르게 된다.
가령 영랑의 [오월] 같은 시는 봄 들판의 약동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인데
시각적 이미지를 적절히 구사하여 심미감을 높이고 운율의 변화를 통하여
흥겨운 율동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서정적 표현의 한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우리 시의 역사에서 귀중히 간직하고 전수해야 할
표현 상의 백미(白眉)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판단한다.
김영랑의 시에서 인생과 사회에 대한 발언이 중심을 이룬 작품은 아주 적다.
현실에 대한 반응을 보인 예로는 [거문고]라든가, [독을 차고], [우감(偶感)],
[춘향] 등의 작품을 들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점 때문에 현실주의적 시각을 가진 사람은 김영랑의 시가
우리에게 어떤 효용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앞에서 말한 [오월]처럼 자연의 정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일관한 작품은 그런 지적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러나 인생과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만 우리의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는 관련이 없는 듯한 자연에 대한 상상도 우리의 감정을 풍요롭게 하며,
새로운 비유와 표현의 구사도 언어사용의 폭을 넓힘으로써
실제의 삶을 윤택하게 가꾸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자연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아름다운 언어와 절묘한 기법으로 표현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김영랑의 시는 그 나름의 충분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